차시무성승유성(此時無聲勝有聲). 당나라 시인 백거이(白居易)의 대표작으로 불리워지는 ‘비파행(琵琶行)’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이 순간 소리가 없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이긴다’는 뜻이다.

갈멜산에서의 엄청난 승리와 함께 엘리야가 소망하던 꿈은 허망하게 끝이 나는 듯이 보였고, 도리어 그는 생명의 위협을 받고 호렙산 굴로 피신하게 된다. 하나님은 절망적인 마음 가운데 있는 엘리야에게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왕상 19:11,12) 물리적 위협 앞에 움츠리고 있던 엘리야에게 하나님께서는 물리적인 ‘강한 바람’이나 ‘지진’과 ‘불’ 가운데 계시지 않으시고 도리어 ‘세미한 소리’로 나타내신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것은 웅변이나 논리가 아니요 성령의 아름다운 감화로 말미암는 것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세미한 소리’가 조용하고 분명하게 마음을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졌음을 가르치고자 하심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모함을 받고 파직당한 뒤 원균이 그 자리를 대신하지만, 그는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해 궤멸하고 만다. 선조 임금은 대안이 없자 이순신을 불러 다시 전장에 나가게 했다. 억울함 속에 증오가 있을 법도 하지만 그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의 난중일기에는 군관 병사와 마을의 노인, 심지어 한경 돌쇠, 해돌 자모종 등 노복들의 이름들까지 꼼꼼하게 기록돼 있지만, 자신의 억울함은 한 글자도 남기지 않고 오히려 조국을 사랑하는 힘으로 승화시킨다. 그리고 그 침묵을 바탕으로 명량해전을 승리로 이끌게 된다. 어떻게 보면, 이순신 장군의 위인 됨이 ‘차시무성승유성(此時無聲勝有聲)’같은 그의 삶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을 갖게 한다.

오래 전 나의 첫 목회지에 공무원 남편을 둔 한 집사님이 들려준 이야기이다. 지역의 유명한 관광지에 치매가 있는 노모가 버려져 공무원들이 돌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간혹 정신이 온전하신 때가 있어서 집과 자녀 이름을 물어보면 대답을 일부러 하지 않는 듯이 보였다. 버려진 중에도 노모는 혹여 자녀에게 피해가 갈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털 깎는 자 앞에서도 잠잠한 양처럼 침묵하시며 십자가를 지셨던 예수님의 이야기는 패역한 우리의 죄를 덮어 주시고, 우리의 수치를 가려 주시는 슬픈 하늘 사랑의 이야기이다. 곤욕과 괴로움 중에도 입을 열지 않은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의 사랑의 침묵이 나를 구원한 것이다(사 53:7).

필리핀 민다나오의 산골 지역에 파송되었던 선교사가 선교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울창한 산의 숲과 들판으로 이루어진 선교지는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다. 선교사가 머물던 집 앞으로 매일 물을 긷고 나르는 소녀가 보였다. 가녀린 체구에 무거운 물을 들고 나르는 모습이 안쓰러워 선교사는 물통을 먼 소녀의 집까지 운반해 주었다. 꽤 긴 거리였다. 물통 운반을 도운 후 어떤 반응을 기대했지만 소녀는 선교사를 잔뜩 경계할 뿐 아무 표정도 아무 말도 없다. ‘나를 전도하기 위해 잠시 나타난 외국 선교사 중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고 했다. 그 후에도 선교사는 집 앞을 지나는 이 소녀를 볼 때마다 말없이 물통을 집에까지 운반해 주었다. 소녀도 선교사도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선교사는 그렇게 6개월을 말없이 물통을 운반해 주었다고 했다. 6개월이 지난 후 소녀가 처음 입을 열었다. ‘나 이번 주, 너네 교회 가도 되냐’고 말이다. 안식일, 긴장된 마음으로 교회에 들어섰을 때 선교사는 교회에 앉아 있는 소녀를 보고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고 했다. 그 소녀는 그렇게 재림 교인이 되었다. 6개월 동안 소녀가 보일 때마다 선교사는 물통을 운반하며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지만, 성령의 ‘세미한 소리’는 소녀의 마음속에 말씀하며 그를 변화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대의 선교사들이여, 차시무성승유성(此時無聲勝有聲), 소리 없음이 세상의 모든 소리를 이기는 성령의 ‘세미한 소리’로 이 어지러운 세상에 하나님의 사랑을 맘껏 수 놓아 보지 않겠는가?